옹정제(雍正帝)의 내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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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2-11-29 09:3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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옹정제와 같이 정력적인 노력가에게나
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. 그런데
황태자의 불초함을 이용해 장래의 투기에 큰 뜻을 둔조신(朝臣)들이
황태자에게 아첨하여 당파를 만들고 마침내는 부황(父皇)을 시역(弑逆)하려
하는 음모까지 발전했으므로 강희제는 황태자를 폐한 채로 마침내 태자를
세우는 권리행사를 체념해 버렸다. 완전히 China식이 된 것은 강희제
때였으니, 그는 아직 ★Þ을 때에 적장자를 황태자로 책립했다. 그리고 임종시에 옹정제를 후사(後嗣)로
지명했던 것이다. 청조에서도
태종(太宗)까지는 후계자를 예정해 두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. <-(주)
China 군주의 특권 중에는 후계자 지명권이 포함된다된다. 청조 특유의 China지배체제는 옹정제에
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다. 군주독재의 근세에 들어간 China에서도 이만큼
전형적인 독재군주는 달리 없었다.
이 문서는 다시금 천자에게 반납되지만 이 주비유지가 붙은 문서가 궁중에
산적되어 낭하에까지 쌓였다고 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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옹정제(雍正帝)는 또 지방 고관과의 사이에 공문서 이외에 사(私)적인 친전서(親展書)(친히 펴보는 사신(私信))를 교환하고 지방의 실상을 숨... , 옹정제(雍正帝)의 내치인문사회레포트 ,
옹정제(雍正帝)의 내치
옹정제(雍正帝)는 또 지방 고관과의 사이에 공문서 이외에 사(私)적인
친전서(親展書)(친히 펴보는 사신(私信))를 교환하고 지방의 실상을 숨기지
말고 보고하게 했다. 그것은 후사의
이름을 적은 쪽지를 상자에 넣고 궁중의 정대광명(正大光明)이라고 쓴 액자
뒤에 숨겨 두고 만일 천자가 지명을 하지 않고 죽은 경우에는 대신들이
입회한 가운데 상자를 열어…(투비컨티뉴드 )
설명
레포트/인문사회
친전서(親展書)(친히 펴보는 사신(私信))를 교환하고 지방의 실상을 숨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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옹정제(雍正帝)는 또 지방 고관과의 사이에 공문서 이외에 사(私)적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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순서
다. 그는 밤늦게까지 홀로 이 태접(泰摺)을 열람하고
거기에 주필(朱筆)로 답신, 주비유지(주批諭旨)를 기입하여 돌려 보냈다. 세조(世祖)
때에 와서 점차 China식의 천자가 되었지만 그런데도 사후의 유조(遺詔)에
의하여 강희제를 지명했던 것이다. 옹정제는 이 실패를 목격했으므로 자신도 태자를 세우지
않고 이른바 태자밀건법(太子密建法)이란 것을 고안했다. 그도 그럴 것이
몽고(蒙古), 만주(滿洲) 같은 북방민족의 군주는 유력자의 집회에서 선거
되어야 할 것이니 바꿔 말하면 군주는 1대에 한한 것이었다.